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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August 13, 2020

해방 직후 '세 가지 갈림길'…만약 이랬다면? - 한겨레

buahasema.blogspot.com
①스탈린이 38선 거부했다면…한국 대신 일본이 분단 됐을 수도
②총독부가 송진우 택했다면…건준 둘러싼 역동적 역사 없었을 것
③좌우합작 성공했다면…분단·전쟁 없는 통일국가 수립 가능했을까?
1945년 9월2일 일본 정부 대표단이 도쿄만 위에 미주리호에서 정식 항복식에 나서는 모습. 제일 앞 줄에 연미복을 입은 이가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상, 그 옆의 군복 차림의 남자가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이다.
1945년 9월2일 일본 정부 대표단이 도쿄만 위에 미주리호에서 정식 항복식에 나서는 모습. 제일 앞 줄에 연미복을 입은 이가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상, 그 옆의 군복 차림의 남자가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이다.
조선이 해방되던 1945년 8월은 세계적 격변기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를 상대로 자국민 2000만명의 목숨을 쓸어 넣는 처절한 혈투를 벌인 소련은 5월9일 마침내 독일을 무너뜨렸다. 스탈린의 다음 목표는 러-일 전쟁에서 뼈아픈 패배를 안겼던 ‘극동의 숙적’ 일본이었다. 이를 위해 스탈린은 2월8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소련의 대일 참전 조건에 대해 ‘얄타 밀약’을 맺었다. 같은 시기 미국은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 3년 반 동안 태평양에서 일본과 힘겨운 싸움을 벌인 끝에 사이판·필리핀·오키나와 혈전을 통해 결정적 승기를 잡았다. 하지만 미군 주력은 필리핀과 오키나와 전투의 여파로 여전히 한반도에서 1000㎞나 떨어진 지역에 머무르고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해외 조선인 독립운동 세력은 수십년간 치열한 투쟁을 벌였음에도 연합국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진 못한 상태였고, 국내에선 여운형·안재홍·송진우 등 극히 일부 인사만이 친일로 몸을 더럽히지 않은 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반도에 해방 소식이 알려지던 1945년 8월15~16일 이틀 동안 한민족의 운명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세가지 결정이 내려진다. 첫번째 결정은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다는 내용의 일반명령 1호를 승인하는 스탈린의 결정이었다. 미국은 일본이 1차 항복 의사를 전해온 8월10일 밤 연합국 각국이 점령해야 할 지역을 분할하는 일반명령 1호 초안을 작성했다. 육군부 작전국 전략정책그룹에 속한 찰스 본스틸(훗날 주한미군사령관)과 데이비드 러스크(훗날 국무장관) 대령은 “가능한 한 북방에서 항복을 수리하기 원하는 미국의 정치적 욕구와 (실제) 도달할 수 있는 능력” 사이에서 고심한 결과 북위 38도선을 미·소의 분할 점령선으로 정했다. 스탈린은 16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전한 서신에서 이 결정에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 소련이 “홋카이도의 북쪽 절반”을 점령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트루먼은 이 요구를 거부했고, 스탈린은 강한 분노를 드러내면서도 이를 수용하고 만다. 만약 한반도와 일본 점령을 둘러싼 미-소 간의 의견 조정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동아시아 전체의 운명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15일을 기준으로 소련군은 이미 청진 등 한반도 북부에 상륙한 상황이었고, 미군 주력은 오키나와에 머무르고 있었다. 점령을 위한 속도 경쟁이 이어졌다면, 한반도는 소련에 점령돼 분단을 피하는 대신 공산화됐을 것이고, 분단의 아픔을 맛보는 것은 일본이었을 것이다.
1945년 9월9일 오후 4시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진행된 조선총독부와 일본군 항복식 전경. 허리를 굽혀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이가 아베 노부유키 조선 총독이다.
1945년 9월9일 오후 4시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진행된 조선총독부와 일본군 항복식 전경. 허리를 굽혀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이가 아베 노부유키 조선 총독이다.
두번째 결정은 엔도 류사쿠 총독부 정무총감이 해방 직후 일본인의 안전을 의탁할 조선인 유력자로 여운형을 택한 것이었다. 엔도는 훗날 이 결정에 대해 “당시 조선 민중 사이에 명망도 높고, 과거 독립운동의 경력으로 (봐도 그렇고) 그리고 나와 깊은 우정의 연도 있고 평소 그의 민족운동에 대한 이해와 존경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해방을 앞두고 여운형의 라이벌이던 송진우에게도 치안 협력을 의뢰하는 총독부의 제의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 ‘여운형이 먼저냐, 송진우가 먼저냐’ 논쟁은 이후 해방 직후 좌우의 자존심을 건 큰 싸움으로 비화한다. 그러나 엔도가 송진우를 택했다면, 합작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송진우는 “그들이 형세가 궁하게 되면, 자치와 독립을 허여한다고 할 것”이라며 그러면 “필경 허수아비 정권밖에 되지 못할 것이고 민족반역자의 이름을 듣게 된다”며 경거망동을 절대 삼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다면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윈회를 둘러싼 다이내믹한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1945년 9월9일 경성에 진주한 미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 <뉴욕타임스> 기사.
조선총독부가 1945년 9월9일 경성에 진주한 미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는 뉴욕타임스> 기사.
마지막 결정은 여운형과 송진우의 좌우합작 실패였다. 해방 직후 여운형은 송진우에게 건준에 참여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지만 송진우는 꿈쩍하지 않았다. 당시 좌우합작이 성공했다면, 소련이 점령한 북한과 별도로 남한 내 정치통합이 이뤄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랬다면 모스크바 3상회의 안을 둘러싼 남한 내 좌우 진영 간의 찬탁·반탁 논쟁은 생산적으로 이뤄졌을 것이고, 3상회의의 미-소 합의에 따라 ‘통일된 임시정부’ 구성이 현실화됐을지도 모른다. 해방 직후 두 인물의 합작 실패가 한반도의 분단을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너무 중요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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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14, 2020 at 12:4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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