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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ugust 29, 2020

술 없는 남자 둘의 여행도 술술 풀릴까 - 한겨레

buahasema.blogspot.com
[토요판] 이런 홀로
알코올과 유흥 없이 3박4일

30대 중반, 동성친구와 제주도
나는 맛집·관광지 투어에 집중
친구는 여행지 로맨스 꿈꿔

알코올 없이 서핑, 등산, 낮잠
생각 정리하는 여유로운 시간
따로 또 같이, 그것도 괜찮아

친구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라산을 오르내리며 복잡했던 머릿속과 고민이 많이 정리되었다는 거였다. 내겐 처음부터 그저 즐겁고 신나는 여행이기만 했는데 왠지 모를 미안함과 뭉클함이 밀려왔다. 게티이미지뱅크
친구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라산을 오르내리며 복잡했던 머릿속과 고민이 많이 정리되었다는 거였다. 내겐 처음부터 그저 즐겁고 신나는 여행이기만 했는데 왠지 모를 미안함과 뭉클함이 밀려왔다. 게티이미지뱅크
대학교 친구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 ‘제주도 여행’을 제안했다. 내가 띄운 톡 옆에 붙은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지만 좀처럼 반응이 없었다. 꽤 긴 침묵이 이어진 뒤, 친구들은 하나둘씩 불참을 선언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 이미 결혼했거나 아이가 있어 쉽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미리 정해놓은 약속도 아니니 그들의 거절이 딱히 서운할 일도 아니었다. 혼자라도 다녀와야지 생각하던 찰나에 한 친구가 참가 선언을 알렸다. 그렇게 남자 ‘둘’의 제주도 여행이 결정됐다. 아직 비혼인 우리에게도 이런 즉흥적인 결정에는 적절한 후속 작업이 필요했다. 나는 여자친구에게 힘든 일이 생긴 친구와 위로 겸 여행을 다녀와야 할 거 같다는 명분을 궁색하게 설명해야 했고, 친구는 애인도 없는 녀석이 이 와중에 남자끼리 여행이 웬 말이냐는 어머니의 타박에 내가 곧 결혼할 거라 마지막으로 떠나는 우정 여행이라는 임기응변을 꺼내야만 했다. 30대 중반에 접어들며 이제는 즉흥적인 결정과 행동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제는 철이 들어야겠다는 압박감, 낭만을 누릴 인생의 공간이 점차 줄어든다는 아쉬움이 마구 교차하며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둘이 싸운다’에 500원 10년 넘는 시간 동안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냈지만 둘이서만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새로웠다. 나는 미리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걸 선호하는 반면 친구는 정말이지 무계획의 상징이었다. 미리 알고 있던 모습이었지만 여행이 가까워질수록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조급함이 생겼고 친구는 반대로 그런 내 모습에 무언가를 의논하고 제안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과 미안함이 점차 커지는 듯했다. 급기야 우리의 여행 준비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친구들은 여행지에서 우리 둘이 100% 싸운다는 이상한 내기를 걸기 시작했다. 어쨌건 그렇게 모든 여행 준비는 내가 도맡았다. 출발 전 내가 전달한 일정에도 친구는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원래 그렇게 호불호 없이 모든 것을 흡수하는 무던한 친구였다. 그래도 내심 걱정이 되긴 했다. 솔로인 친구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마냥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를 꿈꾸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나는 맛집과 관광지 투어에만 관심이 있었다. 친구는 여행 당일 오전에서야 비행기 시간을 물어왔고, 아슬아슬한 동상이몽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잠을 청했고 친구는 부족한 알코올과 혹시나 하는 여행지의 로맨스를 찾아 밖으로 다시 나갔다. 이런 게 바로, 따로 또 같이, 뭐 그런 건가. 날아라통닭 제공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잠을 청했고 친구는 부족한 알코올과 혹시나 하는 여행지의 로맨스를 찾아 밖으로 다시 나갔다. 이런 게 바로, 따로 또 같이, 뭐 그런 건가. 날아라통닭 제공
첫날은 특별한 일정이 없었다. 저녁 먹고 숙소 근처 해변을 거닐며 맥주 캔 하나를 홀짝이는 정도였다. 그 정도로도 충분한 행복과 여유가 느껴져 좋았다. 그리고 다음날 예정된 서핑 체험에 몸을 사리고자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돌아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긴 했으나 술이 없는 탓에 확실히 어색한 느낌이 감돌았다. 남자들끼리 여행에서는 대학교 엠티처럼 늦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체크아웃 시간이 가까워져 쫓기듯 나와 해장국을 먹는 게 보통이다. 유명한 맛집이나 카페들을 찾아 떠도는 행위는 놀림감이 되기 딱 좋은 행동이다. 여행지에서 추억이나 사진을 남기기보다는 술만 마시다가 온 기억, 그게 남자들의 여행 결과물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예전부터 스스로 겉돌았다. 친구들과 모임에서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되면 홀로 집으로 돌아가거나 여행지에서도 술자리가 무르익기 전에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런 나를 잘 아는 친구였어도 단둘이 떠난 여행인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긴 했던 것 같다. 친구에게 그런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읽히긴 했으나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잠을 청했고 친구는 부족한 알코올과 혹시나 하는 여행지의 로맨스를 찾아 밖으로 다시 나갔다. 이런 게 바로, 따로 또 같이, 뭐 그런 건가. 이튿날, 내가 예약해 놓은 일정대로 서핑 체험에 참여했다. 1시간가량 교육을 받고 바다로 향했다. 강사의 주도하에 여러 차례 파도와 맞서며 일어서려 했으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둘 다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곧잘 해내며 같은 시간대의 사람들 속에서도 단연 에이스로 인정받으며 계속해서 박수를 얻어냈다. 남자들 사이의 묘한 경쟁심이 일었다. 눈에 힘을 주고 열심히 해보려 했으나 그럴수록 몸에 힘이 들어간 탓인지 픽픽 쓰러지며 민망함이 파도와 함께 나를 감싸 안았다. 그래도 물 속에 들어가 있는 순간은 천국이 따로 없었다. 물을 등지고 누워 보기 좋게 흩어진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은 지금도 적절한 말을 찾기 힘들 정도다. 그냥 너무 좋았다는 말밖에. 색다른 경험에 친구도 예상보다 훨씬 즐거운 듯했다. 서핑에 녹초가 된 우리는 숙소로 들어가 한가로이 낮잠을 청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진짜 여행은 이 다음날 예정된 한라산 등산이었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등산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호흡이 가빠지고 말수가 줄었다. 제주도까지 가서 힘들게 한라산 등산을 선택한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런 내 선택을 원망하는 친구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누구 하나 포기를 꺼내기엔 평생 놀림거리가 될 게 뻔했다. 그렇게 서로의 눈치를 보며 하염없이 위를 향해 걸었다. 3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까마득한 백록담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쳤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너무 좋은 날씨와 함께 절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다다른 순간 말문이 막힌 채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그림이 펼쳐졌다. 주변의 소음도 자동으로 차단된 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모든 삶의 불안과 걱정이 해소되는 느낌이랄까. 여행은 백록담이면 충분했다 그러고는 또다시 숙소로 돌아와 긴 낮잠을 청했다. 3박4일의 여행에서 우리가 한 것이라곤 서핑과 한라산 등산, 그리고 낮잠뿐이었다. 고단한 탓인지 첫날을 제외하고는 친구도 술과 혼자만의 여흥을 찾지 않았다. 내게는 적당히 여유롭고 꽤 기억에 남을 만한 여행이었지만 친구는 어땠을지 내내 궁금했다. 그리고 여행을 마무리하고 헤어져 집에 들어서는 순간 친구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잘 도착했냐는 물음과 함께 고맙다는 인사가 있었다. 사업이 어려워져 정리를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내가 여행을 제안했고, 한라산을 오르내리며 복잡했던 머릿속과 마음의 고민이 많이 정리되었다는 거였다. 그리고 오랜 시간 내리지 못했던 결심이 덕분에 서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내겐 처음부터 그저 즐겁고 신나는 여행이기만 했는데 친구의 메시지를 받고 왠지 모를 미안함과 뭉클함이 뒤늦게 밀려왔다. 친구와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였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또 나만의 방식으로 친구에게 홀로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주었던 건 아닐까. 그런 합리화를 해보며 새로운 갈림길에 선 친구의 인생이 술술 풀리기를 응원해 본다. “친구야, 나랑 또 여행 가줄 거지?” 날아라통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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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9, 2020 at 02:16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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