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버스는 8월17일 출발해 전국을 순회했다. 차별금지법 제정 권한을 가진 국회를 배경으로 평등버스 모형이 서 있다. ‘@오늘의나’ 제공
[토요판] 현장 차별금지법 향해 달리는 평등버스 국회와 정부의 침묵과 유예 속에서 7년 만에 발의된 차별금지법, 그보다 더 오래된 평등에 대한 요구. 더는 늦출 수 없는 평등과 존엄의 약속인 차별금지법 제정, 그걸 외치는 전국의 목소리를 잇기 위해서 전국순회 차별금지법 제정촉구 평등버스는 시작됐다. 그러나 출발이 예정된 8월17일은 기록적인 폭우 직후였고, 코로나19가 다시 확산세를 타기 시작하였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고 길을 떠났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평등버스가 출발했다. 코로나19 이후 더욱 불평등한 처지로 내몰린 이들 곁으로, 인간다운 노동을 위해 싸우는 현장으로, 성차별을 반대하고 청소년의 권리를 외치고 이주여성의 인권을 말하고 난민의 자리와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 속으로 가야 한다는 절실함으로 12박13일, 25개 도시, 2000㎞의 여정을 시작했다.
지역이 차별금지법을 만났을 때 8월17일 평등버스가 방문한 첫 도시는 강원도 춘천과 원주였다. 맞이하러 나온 이들에게 마이크를 넘기니 처음에는 마다했지만 점차 하고 싶은 말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원주에서는 성소수자 자녀를 둔 어머니가 남편분과 함께 발언을 하러 나왔다. 자녀가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파트너와 행복하게 살고 있어서 행복하다며 널리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함께 세상을 바꾸어가자고 말했다. 차별금지법을 주제로 할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8월24일, 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30여명 정도가 문화제를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열 걸음쯤 떨어진 거리에서 중년의 여성분이 서성였다. 기획단에서 슬쩍 다가가 어떻게 오셨는지 물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평등버스가 이곳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어떤 사연인지 묻자 “그냥… 그냥 평등버스가 여기까지 와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는 말만 남겼다. 마스크에 표정이 가려졌지만, 눈으로 하시는 말에서 감격과 슬픔이 함께 보였다. 그분은 문화제 끝까지 함께하고 갔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 누군가 큰 목소리로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외쳐주길 바랐던 그를 만난 순간은 이 버스가 출발한 이유를 증명했다. 원주의 평등버스 일정을 함께한 <선량한 차별주의자> 저자인 강릉원주대 김지혜 교수는 원주 시민사회와의 간담회에 참석한 이들에게 ‘혐오표현’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인지 물었다. ‘지잡대’라는 답변이 금방 나왔다. 그는 이 책을 주제로 강연
을 하면서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답변이 다르다고 했다. 일례로 앞서 언급된 ‘지잡대’ 답변은 수도권일수록 현저히 적게 나온다고 한다. 이렇게 각자가 겪는 차별의 경험이 다르듯 각 지역이 겪어온 차별의 경험과 역사도 모두 다르다. 그렇기에 똑같은 평등버스, 똑같은 평등의 문구로 만나는 모습이 지역마다 매우 다채롭다. 티케이(TK)에 대한 반감을 대표적으로 겪는 대구, 5·18의 아픔을 겪은 광주, 4·3과 강정마을의 아픔을 간직한 제주 지역민이 감각하는 차별은 모두 달랐다. 다양한 차별의 이야기에 마이크를 내주기 위해 이 길을 떠난 것이 아니었을까. 혐오선동세력은 서울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전국 커뮤니티와 네트워크가 있어 평등버스 일정을 미리 공유하고 활동하는 듯하다. 일정이 진행될수록 더 열심히 방해하고, 만났던 단체들을 또 만나게 되는 상황들이 이어진다. 8월20일 혐오선동세력이 우리의 일정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날 오전 10시 포항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는데 ‘동성혼 합법화하는 악법 차별금지법 반대한다’ 등의 문구가 적힌 손팻말과 펼침막을 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여섯명의 사람이 자신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로 1인시위는 국민 모두에게 보장되는 권리라며 우리의 시야에 ‘동성애 반대’ 현수막이 들어오도록 쉬지 않고 움직였다. 펼침막을 시야에서 몰아내려는 우리와 한시간 가까이 사투를 벌였다. 아이를 데리고 나와 평등버스 앞에서 ‘동성애 합법화하는 차별금지법의 위험성’ 전단을 뿌리는 사람은 물론이고 우리 기자회견 사진을 마구 찍어대고 반말을 하며 비아냥대는 이들도 있었다. 이날 오후 대구로 갔다. 앞의 일정이 늦어지면서 대구시민들과 인권활동가들이 이미 기자회견을 진행 중이었는데 그 옆에는
시티(CT·‘크리스천’의 약자로 추정) 로고가 있는 노란 조끼 무리들이 ‘평등을 가장한 악법! 시작은 차별금지법 종점은 국민 역차별이다’란 펼침막을 들고 있었다. 이 노란 조끼 무리들은 8월24일 광주에서 또 만나게 되었다. 이쯤 되니 멀리서 조끼만 보아도 알아볼 수 있었다. 8월25일 전주 풍남문 광장에서는 평등버스 집회 바로 건너편에서 그들이 맞불집회를 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포괄적인 성교육을 받아야 하는 청소년들이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로 동성애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두시간쯤 들었을 때, 평등버스를 첫날부터 함께해온 활동가가 발언을 시작했다. 그는 이날, 이 자리에서 성소수자이며 후천성면역결핍증(HIV) 감염인인 자신을 처음으로 커밍아웃했다. 평등버스와 평등버스를 맞이하는 시민들을 보며 혐오보다 강한 연대의 힘을 보고 마이크를 잡게 되었다고 했다.
8월19일 경북 포항에서 만난 한동대 청소노동자들을 만나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리는 캠페인을 함께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제공
차별금지법 필요한 노동자들 8월22일, 평등버스는 세월호가 누워 있는 목포항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폭염을 압도하는 깊은 슬픔이 우리를 에워쌌다. 우리는 무엇에 홀린 사람들처럼 준비한 노래와 플래시몹 촬영까지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평등버스가 빠듯한 일정 중에도 목포항 세월호 앞으로 오는 최선을 다한 것은 ‘한 사람도 두고 가지 않고, 모두의 존엄을 위하여 일하겠다’는 국가의 선언인 차별금지법과 ‘한 사람의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기는 것이 국가의 책무’임을 일깨운 2014년 4월16일의 세월호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노동자들도 만났다. 차별금지법이 실질적 효력을 발휘할 대표적 영역이 바로 고용이다. 노동자에게 왜 차별금지법이 필요한가를 한 민주노총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사건의 40%가 고용상 발생한 차별에 관한 것입니다. 차별금지 사유와 범위, 구제기구가 모두 다른 지금의 상황을 이제는 해결해야 합니다. 근로계약 문제뿐 아니라 고용관계상 원·하청과의 관계까지 폭넓게 (차별금지법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남녀고용평등법은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지만
기간제법과 파견법은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업체 중에 60%가 5인 미만 사업장입니다. 이 노동자들 다 어떻게 합니까.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 차별과 관련된 개별 법들이 있어 그것으로 충분한 듯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개별 법으로는 복합적인 사유로 인한 차별행위에 대한 구제가 어때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노동현장의 차별은 복합적이고 다양한 사유로 발생한다. 평등버스는 고용형태, 성별, 연령, 장애, 임신·출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하는 차별에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방문 지역마다 곳곳에서 설득했다. 8월19일 아침, 포항 대잠사거리에 도착하니 마침 한동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이 선전전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사연을 출근하는 시민들에게 전했다. 한동대는 코로나19에 따른 재정난을 호소하면서 기숙사 청소를 담당하던 노동자들을 한동대 소유의 밭에서 일하게 했다. 코로나19로 기숙사에 학생들이 없으니 밭에서 수익을 내서 재정난을 메꾸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보직 변경은 비정규직 청소노동자에게만 적용됐다. 애초 계약한 직무와는 무관한 일로 인사이동을 시켜버린 것이다. 한동대는 청소 용역회사와 계약 해지를 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노동자들은 명백한 고용형태 차별이며 코로나19가 휩쓴 일자리 파괴의 단면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부당함을 알리고, 고용형태 차별을 예방하는 차별금지법이 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필요한지 이야기를 나누며 출근길 선전전을 도왔다. 차별로 피해 입고, 차별금지법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이 길을 함께 걷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래서 ‘모두를 위한’ 차별금지법이구나, 평등버스가 가는
걸음마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의 얼굴에서 확인한다.
8월20일 부산에서 열린 문화제. 코로나19 이후 차별금지법 제정 지지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제공
누구도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아 집회와 시위가 자유롭지 못한 시간을 지나고 있다. 기약 없는 시간이다. 코로나19로 얼어붙은 경제는 취약한 노동조건에 놓인 노동자들의 실직과 해고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포항에서 만난 한동대 청소노동자들이었다. 집회와 시위가 가로막히며 말할 자리를 잃은 이들은 코로나19로 일자리만 잃은 것이 아니라 마이크도 잃게 되었다. 코로나19 유행 이후로 어렵게 마주 앉은 서로를 보며 우리가 만나야 했던 분명한 이유를 실감한다. 코로나19를 지나고 있는 사회에 방역만큼 중요한 것은 감염병으로 더욱 심화된 차별과 배제, 소외를 이야기할 안전한 공간이었다. 차별금지법은 그러한 공간을 열고 넓혀갈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재난 상황에서 21대 국회가 차별받고 배제되는 사람을 한 명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의지로 차별금지법의
입법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12박13일 동안 수없이 많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평등버스가 도착한 지역의 시민들이 보내는 연대의 마음을 평등버스에 실어 보낸다. 이 마음이 국회에 가닿기를 바란다.’ 비록 상황이 여의치 않아 평등버스의 성대한 서울 복귀는 어려워졌지만 귀한 연대의 마음은 고스란히 버스에 실어 가는 중이다. 코로나19는 차별과 혐오를 심화시키고 낙인과 배제를 양산하기에 우리는 이 버스를 출발시켰다. 지난 수개월간 코로나19 감염 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몇 번의 집단감염 사태를 경험했다. 그때마다 지목된 이들은 달랐으나 그 집단에 대한 배제 분위기는 다르지 않았다. 코로나19처럼 전염성이 높은 질병은 다시 한번, 누구도 차별과 배제를 피해가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예정 천주교인권위원회·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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